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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자체(字體)의 연변(演變)-고문자 단계

루시엔 아리아 2020. 3. 18.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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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자체의 연변은 고문자와 예서&해서 두 가지 커다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이 포스팅에선 고문자 단계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고문자의 연변은 상대에서 시작되어 진대에서 끝나고, 예&해 단계는 한대에서 시작되어 곧장 현대까지 계속된다.

 

 

1. 상대 문자

 

2400여년 전의 상대에는 점복에 사용되었던 갑골문, 청동기 위에 사용되었던 금문이 주로 자료로 남아있다. 대와 나무에는 갑골문이나 금문보다 훨씬 길고 많은 글자가 쓰여 있을 것이지만, 썩기 쉬워서 현재까지 보존될 수 없었을 것이다.

상대에 붓은 주요한 서사 도구였지만, 글자의 모양을 딱딱한 갑골에 새기는 것은 매우 시간도 들고 힘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효율을 높이기 위해 글자의 필법을 고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주로 둥근 형을 모난 형으로 고치고 꽉 찬 것을 테두리로 고치며 굵은 붓을 가는 붓으로 바꾸는 식이었다.

갑골문은 당시의 일종의 비교적 특수한 속체자이고, 금문은 대체로 당시의 정체자라고 볼 수 있다. 정체자란 비교적 정중한 경우에 사용하는 정규 자체이고, 속체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비교적 간편한 자체를 말한다.

 

 

2. 서주&춘추 문자

 

서주&춘추 시대의 문자를 연구하는 주요한 자료는 금문이다. 금문 외에도 약간의 갑골문이 발견되어 해당 시기의 문자체 연변의 연구자료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서주 금문의 형체는 최초에는 거의 완전히 상대 만기 금문의 작풍을 답습하였지만, 공왕, 의왕 이후에 비로소 변화가 급격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서주 금문의 형체 연변의 주된 추세는 선형화, 평직화이다. 이전에는 자형의 상형정도가 여전히 비교적 높아서 구부러진 선이 매우 많고 붓자국도 굵은 것도 있고 가는 것도 있으며, 근본적으로 붓자국으로 볼 수 없는 상형 모양들을 드러내는 많은 둥근 덩어리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쓰는데 매우 번거롭다. 이러한 상황을 고치기 위해 문자를 선형화, 평직화 시켜야 했을 것이다.

 

선형화란 굵은 붓을 가는 붓으로 바꾸고 방형, 원형의 둥근 덩어리들을 선으로 대체하는 등의 현상을 말한다.

평직화는 구부러지고 꺾인 상형적인 선을 잡아당겨 평평하게 하고, 서로 이어지지 않은 선을 연결하여 하나의 필획으로 만드는 등의 현상을 가리킨다.

 

춘추시대 각국의 금문은 처음에는 모두 서주 만기 금문의 서사 방법을 답습하였지만, 이후에 각 지역은 점차 자기의 특색을 형성하였다. 일부 춘추 중,만기의 금문에는 분명한 예술화의 경향이 나타나서 금문의 자형이 특별히 좁고 길거나 필획을 고의로 부드럽고 구부러진 형태로 만드는 등의 형태 변화가 있지만, 이러한 작풍은 도리어 문자의 상형 정도를 낮출 수 있었다. 춘추 만기에서 전국 초기에 이르는 동안, 새의 형태 등 장식을 가한 조전 혹은 조서라고도 불리는 서체가 유행하였다. 조서는 글자에 새 모양, 벌레 모양 등의 장식을 가한 예술 적인 자체로, 조충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로 초, 송, 오, 월 등에서 유행하였다.

 

주문은 <사주편> 중의 문자를 가리키는데,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사주'는 주선왕(기원전 827-782)의 사관이고, <사주편>은 그가 엮은 자서이다. 이 자서에 사용된 자체를 후인들은 '대전'이라고 불렀다. <사주편>은 일찍이 실전되었지만, 그 가운데 일부분의 글자들의 자형이 허신의 <설문>에 보존되어 있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주문은 마땅히 서주 만기의 문자이다. 그러나 근대의 문자학자들의 주문의 시대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 <설문>에 수록된 주문 가운데 비교적 시대가 늦은 문자가 있다는 관점을 제기하였고, 왕국유와 당란은 주문을 동주 시대의 문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어떤 주문의 자형들은 비교적 이른 고문자 자료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으나, 우리가 현재 파악하고 있는 고문자 자료는 매우 유한하므로 현재 가지고 있는 비교적 이른 자료에서 이러한 글자들을 볼수 없다고해서 그것들이 당시에 또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3. 육국 문자

 

춘추전국시대에 중국 사회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고, 이것은 한자 형체의 연변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감에 따라 속체자의 발전이 일어났다.

육국 문자의 자료는 여러가지가 풍부하게 남아있는데, 동기에 쓰여진 금문, 전국 시대 각국의 관,사에서 쓰인 새인 문자, 화폐에 사용된 화폐 문자, 도기에 사용된 도기 문자, 종이를 사용하기 이전에 사용되던 주요 서사 재료인 간,백에 쓰인 간백 문자 등이 있다.

한대의 경학가들은 고문에 대한 태도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두 파로 나뉘었는데, 한 파는 고문에 대해 회의,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여 단지 금문본 경서, 즉 한대에 통행하던 예서로 쓴 경서만이 믿을 수 있다고 보는 파였고, 또 다른 한 파는 고문을 믿고 고문본 경서를 숭양하는 파였다. 허신은 고문경학파 사람이었으며, 그의 고문에 대한 관점이 이 학파의 공통된 견해였다. 고문경학파가 형성된 시기는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한 때로부터 이미 200년 쯤 지난 이후므로, 사람들은 육국 문자에 대해 익숙하지 않게 되었을 때다. 그래서 고문자가 주문과 서로 다른 것을 보고 그것을 주문보다 더욱 오래된 자체라고 오해하게 되었다.

<설문>과 삼체석경 잔석상의 고문은 전국 문자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문은 '과두문'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이는 고문의 붓자국이 올챙이를 닮았기 때문이다. 

육국 문자의 형체상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속체의 유행이었는데, 간체를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로인해 육국 문자와 서주 만기&춘추 시대의 문자의 형태는 매우 달라지게 되었다.

또한 육국 문자의 큰 특징은 각국의 문자 형태가 다르다는 것이다. 즉, 춘추 시대의 문자에는 지방색이 강하게 드러났다.

 

 

4. 진계 문자

 

진계 문자는 춘추, 전국 시대의 진의 문자 및 소전을 가리킨다.

석각 문자는 진계 문자의 중요한 자료이다. 중국의 가장 유명한 고대의 석각인 <석고문>은 진계 문자에 속하는 것이다.

진이 통일된 이후에 진시황 26년, 도량형을 통일하는 조서를 매우 많은 권, 량에 새기거나 혹은 주조하여 금문도 남아있는 자료이다. 전국 시대와 통일 후의 진의 금문은 칼로 새긴 것이 매우 많고 아울러 매우 거칠게 새겼기 때문에 예서의 형성 문제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전국 후기와 통일 후의 진대 인장은 역대로 발견된 것이 매우 많은데, 인문의 다수는 전문이지만, 또한 조기 고예 혹은 고예에 가까운 전문의 속체도 적지 않다. 

전국 후기의 진국과 진대의 도기 및 전, 와 등에는 도공이나 관부의 인장이 찍혀 있는데, 이와 같은 도문 자료에서도 문자 자료를 볼 수 있으며, 대부분 전문이다.

이 밖에도 칠기 문자에서 보이는 전문, 간백 문자의 전문 혹은 전문과 매우 가까운 조기 예서를 볼 수 있다.

진의 문자는 때로는 자형의 정제와 균형을 추구하기 위해 붓자국을 구부러지게 하였으며, 때로는 같은 목적으로 또는 서사의 편의를 윟여 붓자국을 평직하게 하였다. 이 두가지 변화에 따라 문자의 상형 정도는 더욱 낮아지게 되었다.

춘추 시대의 기타 국가의 문자 자형은 어떤 것들은 정제화, 균형화의 경향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어떤 것들은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더라도 구체적으로 취한 방식은 진의 문자와 서로 달랐다.

문자이형 현상은 각 지역 사이의 경제, 문화 등 방면의 교류에 영향을 주었고, 또 진 왕조의 본토 이외의 지역에 대한 통치에 불리하였다. 그러므로 진시황은 전 중국을 통일한 후에 신속하게 문자를 같게 하는 일을 수행하여 진의 문자를 표준으로 삼아 전 중국의 문자를 통일하였다. 이때 사용된 자체는 소전이다.

소전의 형체를 <석고문>과 대비하면, 비교적 현저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는데, 소전의 자형이 정제, 균형으로 한발 더 나아가 상형 정도가 더 낮아진 것, 그리고 간화현상을 볼 수 있다.

춘추 전국 시대의 진의 문자를 소전과 합하여 '전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설문>을 중심으로 한 전통 문자학에서 소전은 고문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의 진의 문자와 진시황이 통일한 이후 소전이 칼로 자른 듯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므로 두 시대의 문자의 연변에 대한 실제적인 관계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전통 문자학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진 왕조는 정리를 거친 전문으로 전 중국의 문자를 통일하여 기본적으로 각 지의 '문자 이형' 현상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또한 고문자의 이체가 많은 상황을 매우 크게 개변시켰다. 그러나 사람이 문자를 쓰는 습관이 장기간의 실천 중에 형성되는 것이므로 하루아침에 바뀌긴 어려웠고, 그렇기 때문에 육국 문자의 영향을 완전히 지워버리진 못했다. 그러나 문자의 통일을 강압적으로 시행한 결과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문자를 통일한 것이며, 진대 문자에도 이체가 존재하긴 하였다. 

한대에 이르러 예서가 소전을 대신하여 주요한 자체가 되자, 한자 발전사는 드디어 고문자 단계를 벗어나 예서&해서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대 이후, 소전은 주로 인장이나 금석에 새기는데 사용되는 자체가 되어버렸다.

 

 

5. 예서의 형성

 

<한서*예문지>와 <설문*서>에는 모두 예서는 진대에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당시 번잡하고 바쁘던 관옥 사무에 대처하기 위하여 만든 일종의 간편한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 그밖에도 한대 이래 '정막'이라는 사람이 진시황을 위해 예서를 만들었다는 전설도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라고 볼수는 없다.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진계 문자의 자료를 바탕으로 보았을때, 전국 만기는 예서가 형성된 시기였다. 전국 시대의 기타 국가의 문자와 서로 비교하였을때, 진의 문자는 비교적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 나라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서사의 편의를 위해 역시 정체의 자형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개조하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 진의 문자의 속체가 바로 예서 형성의 기초였다.

진의 문자의 속체에는 방절의 필법으로 정규 전문의 둥글게 도는 붓자국을 개변시키는 기풍이 유행이었다. 단지 이러한 변화 때문에 어떤 글자들에 짙은 예서의 맛이 생겨나게 되기도 하였다.

진대 죽간상의 문자는 수가 많을 뿐 아니라 또한 모두 직접 붓으로 쓴 것이므로 이를 통해 당시에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문자의 진정한 면모를 볼 수 있다.

필법으로 본다면 죽간 문자에서 정규 전문의 둥글게 도는 붓자국은 다수가 이미 나뉘어 풀어지거나 혹은 방절, 평직한 필획으로 개변되었다.

자형으로 본다면, 죽간 문자에서 많은 글자의 서사 방법은 정규 전문과 분명히 서로 다르지만, 서한 조기의 예서와는 이미 별 차이가 없다.

이러한 상황을 근거로 하여, 진대 죽간이 대표하는 자체 '진예'를 전문의 속체가 연변하여 이루어진 일종의 새로운 자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서는 분명히 전국 시대의 진의 문자의 속체의 기초 위에 점차로 형성된 것이지, 진시황이 어떤 한 사람으로 하여금 창조해내게 한 것이 아니다.

당란 선생은 <중국문자학>에서 <한서> 등에는 진대에 "관옥에 일이 많았기 때문에 비로소 예서를 세웠다"고 말하였지만, 이것은 결과를 원인으로 전도시킨 것으로서 실제로는 민간에서 이미 통행되던 서체였는데 관옥에 일이 번잡하여 채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진대 죽간이 대표하는 예서는 단지 일종의 완전히 성숙되지 않은 예서일 뿐인데, 그 이유는 먼저, 매우 많은 글자의 서사 방법은 여전히 정규 전문에 접근한 형태이고, 둘째로는 어떤 글자들은 비록 이미 성숙된 예서와 거의 비슷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정규 전문에 가까운 서사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숙된 예서와 구별하기 위해 진과 서한 조기의 예서를 합쳐서 '조기예서'라고 부를 수 있다.

예서 자형의 내원과 관련하여, 예서는 전국 시대 진의 문자의 속체가 발전되어 이루어진 이상, 그 자형 구조는 마땅히 진계 문자의 계통에 속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예서의 자형들은 도리어 <설문>의 소전과 부합하지 않고 춘추 이전의 고문자와 혹은 어떤 육국 문자와 부합하며, 아울러 이러한 글자들이 아주 적다고 할수도 없다. 이때문에 어떤 문자학자들은 예서의 일부분이 육국 문자를 계승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오해이다. 왜냐하면, <설문> 중의 일부분의 소전의 자형은 진, 한 시대에 실제로 사용된 전문과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예서의 일부분이 육국 문자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주요한 예증이 바로 이러한 문제가 있는 글자인데, 예서의 어떤 자형들이 <설문>에서 문제되는 전형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러한 자형들이 육국 문자에서 왔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자형의 연변 과정에서 어떤 비교적 복잡한 현상으로 인해 예서의 자형의 내원 문제에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원칙적으로 예서의 어떤 부분이 육국 문자를 계승한 것이라는 설명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예서가 나온 전문 혹은 전문의 속체에서 예서 자체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동방 국가 문자의 어떠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진대에는 소전이 주된 자체였고, 예서는 단지 일종의 새로 일어난 보조 자체로서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았다. '예서'라는 명칭이 그 신분을 나타내는데, 어떤 사람은 도예에서, 또 어떤 사람은 관부의 '예인' 등에게 명하여 좌서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즉, 예서는 상층 통치 계급이 깔보던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서는 쓰는 것이 소전보다 훨씬 편리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그 발전을 억제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진대에는 예서가 실제로 이미 소전의 통치 지위를 동요시키게 하였고, 서한에 이르러서는 진 왕조가 소전으로 전 중국의 문자를 통일한지 오래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서가 정식으로 소전을 대신하여 주된 자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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